2013년 5월 22일 수요일

쌍문동 유래


쌍문동 유래
쌍문동 동명(洞名)의 유래는 몇 가지가 전해온다.
하나는 현 쌍문동 286번지 근처에 계성(鷄聲)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계성과 그 부인이 이름모를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이 생시에 부모를 정성껏 모시지 못한 것을 후회하여 부모의 묘 앞에 움집을 짓고 여러해 동안 기거하다가 죽자 마을 사람들이 그의 효성을 지극히 여겨 그의 묘 근처에 효자문(孝子門)을 두 개 세운데서 쌍문(雙門)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옛날에는 현 창동 우체국부근에 열녀문이 두 개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또 쌍갈래길에 이문(里門)이 있었으므로 ‘쌍갈무늬’가 쌍문으로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최근에는 ‘쌍문(雙門)’은 효자문(孝子門)이 두 개라 쌍문이라 한것인데, 효자 남궁지와 그의 처 하동 정씨(鄭氏), 그의 아들 효자 남궁 조 부자가 고종으로부터 효자문을 받았는데 부자(父子)의 묘소가 노해파출소(옛 쌍문동 중심지)에서 볼 때 남과 북에 있어 ‘쌍문’이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목 해등촌면에 속하였으며, 1912년에 편찬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경기도편에 나타나는 양주군 해등촌면 12개 리 가운데 소라리(所蘿里)·계성리(鷄聲里)지역에 해당한다. 1914년 노원면과 해등촌면이 통합되어 노해면이 설치되었을 때 소라리·계성리가 통합되면서 쌍문리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났다.
1963년 1월 1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이 서울시 성북구 노해출장소에 편입되면서 쌍문리는 창동 동사무소 관할 하에 있었다. 1973년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도봉구에 편입되었으며,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쌍문1~4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1960년 이전까지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을 위주로 하고 있었으며, 그 후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하여 쌍문로와 도봉로 주위에는 상가가 밀집되어 있다. 자연마을로 계성동, 쇠죽골, 해등천 등이 있었는데, 이 마을들이 합쳐져 동을 형성하였다.
▲박수겻 고개 : 쌍문리에 있는 고개
▲쇠죽골 : 쌍문1동 내시묘(內侍墓)가 있는 아랫마을인데, 동대문시장에 소를 팔러 가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소장수들이 이곳에서 쇠죽을 먹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소여물골이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경기도와 서울의 연락도로로 주막도 있었다.
▲제성동 : 계성과 효성 지극한 아들이 살았다는 마을. 지금의 쌍문1동 지역.
▲해등천(海等川) : 현 쌍문2동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소군래라는 하천에서 깨끗한 물이 이마을을 거쳐 방학동으로 흘렀는데, 물이 바닷물처럼 맑아서 해등천이라고 불렀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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