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12일 일요일

버티고개 _서울숲남산길


중구 신당동 끝과 약수동이 이어진 부근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곳에 있는 고개와 한남동에서 장충단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통틀어서 버티고개라 하였고, 한자로 벌아령(伐兒嶺) 또는 부어치(扶於峙)라 하였다. 근래에는 약수동길의 고개를 약수동고개라 하고, 한남동∼장충단 고개는 장충단고개라 한다. 버티고개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온다.
첫째, 예전 이 고개는 좁고 험한데다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도적이 들끓었다. 순라꾼들이 야경을 돌면서 ‘번도’라고 외치며 도둑을 쫓았는데, 이 말이 차츰 변하여 번티(番峙)라 하다가 버터, 버티라 하고 한자명으로 부어치(扶於峙)가 되었다는 것이다.

새가 험상궂고 마음씨가 곱지 않은 사람을 보면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라는 농담이 생겨났다.

실제 버티고개에는 조선초기부터 도둑이 들끓어 『조선왕조실록』에도 그 사실이 적혀 있다. 몇가지 예로 세종 13년(1431) 4월에 버티고개에 있는 초막에 도적떼가 침입하여 승려 3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빼앗아 달아났다. 조정에서는 병조·형조·의금부·한성부로 하여금 도성 4대문을 막고 수사케 하였다. 10여일만에 도적떼 6명을 체포하여 참형에 처하였지만 수사과정에서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애궂은 봉변을 당하였다. 예종 원년(1469)에는 버티고개 남소문에서 도적떼가 군사들을 죽이고 수문 선전관을 쫓아내어 도성 내외를 소란케 함으로써 그 후 남소문을 폐쇄하는 일까지 생기게 하였다. 성종 10년(1497)에는 버티고개 일대에 도적떼가 많은 것은 그 곳 일대에 소나무숲이 무성하여 도적들이 숨기 때문이라 하여 한성부로 하여금 소나무숲을 베게한 일도 있었다.
둘째, 조선초기의 풍수지리설에 관련된 것이 있다. 서울의 주산인 북악의 부아암(負兒岩)이 마치 어린아이가 등에 업혀 밖으로 달아나려는 형상인 까닭에 그것을 막기 위해 떡고개(아현)를 두어서 떡을 가지고 아이를 달래 머무르게 하고, 또 남쪽에는 벌아령(伐兒嶺)을 두어서 아이가 나가면 벌을 주겠다고 하여 아이를 못나가도록 막았다는 것이다. 그 벌아령이 변하여 버티고개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버티고개의 ‘버티’는 밝음, 광명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다. 버티고개의 ‘버티’는 『숙종실록』 권49 숙종 36년 11월 정사조(丁巳條)에 안정기(安鼎基)의 상소문 중에 보이는 ‘부아현(負兒峴)’의 원어로 생각하는 것이다. 즉 ‘부아(負兒)’는 우리 말의 광명을 의미하는 말인 ‘불’ ‘부여’의 한문식 표기인 것으로 옛부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중심지에서 동남방에 있는 산과 고개의 이름이 흔히 ‘부아(負兒)’로 쓰여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버티고개 역시 고개의 방위가 서울의 동남방에 해당되기 때문에 ‘일출산(日出山)’ 또는 ‘광명현(光明峴)’을 의미하며 ’버티’라고 불리어졌다는 것이다.

버티고개 마루에는 버터약수라는 약수가 있었다. 물맛 좋기로 유명하여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은 누구나 쉬어가면서 약수를 마셨다. 약수동이란 행정동명도 이 약수에서 유래되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 약수터 자리에 ‘버터약수터 자리’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이 버티고개에는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만 남소문(南小門)이 세워져 있었다. 서울특별시기념표석위원회는 1985년 남소문 자리에 기념표석을 설치했는데, 현재의 타워호텔 부근 고개 마루턱이다.
남소문은 서울성곽 4소문 중의 하나로 그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세조 2년 11월∼3년 9월 사이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시기적으로 보아 세조 3년(1457) 봄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중구 광희동에 있는 광희문(光熙門)은 태조 5년(1396)에 도성을 쌓을 때 축조된 것으로 서울의 남소문에 해당되지만 속칭 시구문(屍口門)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는 하나 남소문이라고 칭하지는 않았다.
조선 초에 남쪽지방에서 한강나루(한남동)를 통해 도성으로 들어오려면 광희문을 이용해야 하는데, 한강을 건너 바로 버티고개를 넘지 않고 동쪽으로 산등성이가 높고 낮은 길들을 돌아서 광희문으로 들어오는 것은 불편하다 하여 이곳 버티고개에 새문을 건립하자는 의견에 따라 남소문을 건립한 것이다. 이에 따라 남소문은 강남과 성내 통행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남소문이 있으므로 해서 지금의 장충동 일대를 예전에는 남소동(南小洞)이라 하고 이곳에 있었던 병영을 남소영(南小營)이라 하였다.
그러나 남소문은 건립된지 12년만인 예종 원년(1469)에 폐쇄되었다. 이 때 지경연사 임원준(任元濬) 등이 남소문은 수레조차 다닐 수 없으므로 실용성이 없다고 폐쇄를 건의하였고, 음양가(陰陽家)들이 서울의 동남쪽을 개방하면 나라에 화가 미칠 것이라고 함에 따라 예종은 남소문을 폐쇄하였다. 서울의 동남쪽을 개방하면 화가 미친다는 예는 이곳에 남소문을 건립한 후인 세조 3년(1457) 9월에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사망하였으며, 또 하나는 남소문을 열어 놓으면 도성 안 부녀자의 음행(淫行)이 많아진다는 속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폐쇄 바로 한달 전에 남소문에 도적떼가 출몰한 사실도 폐쇄의 한 원인이 되었다.
예종 때 남소문 폐쇄가 있은 후 84년이 지나 명종 8년(1553)에는 남소문을 다시 개통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즉 도적떼가 남소문이 잠기고 인적이 끊긴 것을 이용하여 성 밖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성을 넘어와서 날뛰게 되므로 성문을 열어서 인마의 왕래가 많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숙종 때에도 몇차례에 걸친 남소문 개통 건의가 있었지만 번번히 풍수지리설에 의한 반대론에 부딪쳐 개통되지 못하고 말았다. 예종 원년(1469)에 폐쇄된 남소문은 존속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언제 훼손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제 때에는 주초(柱礎)마져 없어져 버렸다.
남소문 부근에는 많은 관아가 위치하고 있었다. 남소문 옆에는 조선시대에 수도방위와 왕실 호위를 맡은 어영청의 분영(分營)인 남소영(南小營)이 있었다. 남소영의 규모는 건물만 194간에 이르고 부근에는 군영과 관련된 건물들이 집결되어 있었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보면 남소영 북쪽에 137간의 남창(南倉)이 있고, 영내에는 52간의 화약고가 있었다 한다. 이외에도 수도 경비를 맡았던 금위영(禁衛營)의 화약고도 남소문 부근에 있었다. 남소문 부근에 이러한 관아의 부속창고가 있었던 것은 한강나루에서 곧 바로 이곳으로 물자 수송을 할 수 있는 교통상의 편리와 함께 도성 방어의 지리적 조건 때문이었다.
약수동에서 버티고개로 올라가는 오른쪽에는 장충단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장충단공원은 조선말 을미사변(乙未事變)과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 당시에 순국한 충신·열사들의 제사를 지내던 장충단(奬忠壇)이 있던 곳이다. 장충단은 광무 4년(1900)에 처음 건립되었다. 일제 때에는 대일감정을 악화시킨다는 이유로 제사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이 부근 일대를 공원으로 만들고 벚꽃 수천그루를 심고 장충단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경성부에서 관장하였다. 또 이등박문(伊藤博文)의 보리사(菩提寺)인 박문사(博文寺)를 세우는 등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음모가 깃들어 있던 곳이기도 하다.
6·25전쟁으로 장충단 사전(祠殿)과 부속건물은 파손되었으며, 현재 장충단공원 일대에는 장충단비·수표교·사명대사동상·유관순동상·최현배동상 등이 있다. 지금은 배드민튼·에어 로빅 등 새벽운동을 하는 시민, 남산을 조깅하는 시민들로 많이 이용되고 있으며, 도심 속의 휴식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장충단공원 맞은 편에는 장충체육관이 있으며, 체육관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의 왼쪽으로 호텔신라·자유센터·타워호텔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맞은편 남산 기슭에는 국립중앙극장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이 곳을 통과하는 지하철6호선에는 버티고개의 이름을 따서 「버티고개역」이 있다.


서울 성동구 서울숲과 한강, 중구 남산을 연결하는 '서울생태문화길' 프로젝트 요충지 버티고개 생태통로가 완공됐다. 한강에서 남산으로 진입하는 신당동 다산로 버티고개는 한남대로와 다산로·장충단로가 한데 모이는 교통의 요지. 남산으로 가려면 꼭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다.

1년의 기간과 40억원 예산이 투입된 생태통로는 버티고개 도로 위에 만들어졌다. 통로 폭 26~42.6m, 길이 62.9m, 높이 15m 규모로 "도로로 끊어졌던 남산의 허리를 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통로 주변에는 복자기·산딸나무 등 나무 1만7452그루와 각종 꽃·풀을 심었다. 이종남 서울시 자연생태과장은 "버티고개 통로는 시민뿐 아니라 동·식물이 어우러진 생태통로가 될 것"이라고 했다. 시는 남산타운 아파트, 장충단로, 남산그린빌라에서 버티고개 생태통로로 진입할 수 있는 목재계단 5곳 350m를 설치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