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8일 화요일

허공바위

소가 7개의 칼을 몸에 맞고서 쓰러져 있는 것을 마을사람들이 발견하여 안골, 각심절, 벼루말 동네사람들이 산제를 지낸 것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소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서 제를 지냈으나 밀도살을 할 수 없어서 지금은 약식으로 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제각이 있어서 그곳에 모든 제기를 보관하고 음식을 준비 했으나 6.25 전쟁으로 소실되어 버렸습니다. 

허공바위에서 제를 올리는데 흰 천으로 양 옆을 두르고 천신의 기를 받아야 하므로 하늘을 막지않고 지냈습니다. 

동네 사람에게 가장 존경받는 어르신이 제주가 되어서 3일간 외부의 출입을 하지 않았으며 누구와도 접촉하기 않고서 경건한 마음으로 제를 지냈습니다. 

1년에 3회 지냈는데 2월 초하루는 통합적으로 제를 지냈고, 6월 초하루는 할머니 산제라 하여 간소하게 소 내장으로 산 밑에서 지냈으며, 10월 초하루는 통소를 잡아서 지냈다고 합니다. 

지금은 10월에 한번 제를 올린다고 합니다. 

노원구에는 마을 공동체 의식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월계동

안골 치성제(월계동)
소가 7개의 칼을 몸에 맞고서 쓰러져 있는 것을 마을사람들이 발견하여 안골, 각심절, 벼루말 동네사람들이 산제를 지낸 것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소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서 제를 지냈으나 밀도살을 할 수 없어서 지금은 약식으로 제를 올리고 있다. 이전에는 제각이 있어서 그곳에 모든 제기를 보관하고 음식을 준비 했으나 6.25 전쟁으로 소실되어 버렸다. 허공바위에서 제를 올리는데 흰 천으로 양 옆을 두르고 천신의 기를 받아야 하므로 하늘을 맞지않고 지냈다. 동네 사람에게 가장 존경받는 어르신이 제주가 되어서 3일간 외부의 출입을 하지 않았으며 누구와도 접촉하기 않고서 경건한 마음으로 제를 지냈다. 1년에 3회 지냈는데 2월 초하루는 통합적으로 제를 지냈고, 6월 초하루는 할머니 산제라 하여 간소하게 소 내장으로 산 밑에서 지냈으며, 10월 초하루는 통소를 잡아서 지냈다. 지금은 10월에 한번 제를 올린다.

녹천마을 치성제(월계동)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이유대감이 벼슬을 그만두고 경치 좋고 한적하며 조용한 곳을 찾아 기거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처음 이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그의 호가 녹천이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녹천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녹천대감을 기리는 치성제를 지내게 되었는데 결구 이 치성제가 마을 공동의 제사로 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음력 2월 초하루와 6월 초하루, 10월 초하루에 제사를 지낸다. 또한 치성제의 신주(神主)인 녹천대감의 생신날(음력 2월 16일)이 따로 있어 그 날도 면국수와 산적 등의 제사음식을 차려 간소하게 제주(祭主)가 제(祭)를 지낸다.

월계동 각심제(월계동)
월계2동 마을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구능 할머니, 할아버지라 불렀으며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없어졌다. 매년 10월 초순 좋은날을 받아 마을의 대동단결을 위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치성제이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조선 태종이 임금 왕위에 올랐을 때 흉년, 질병으로 민심이 흉흉해져 각심사 고승에게 도움을 청하자 고승의 말대로 온갖 정성을 다해 지신께 제를 올리자 그 뒤로 풍년과 함께 질병도 돌지 않았다고 하며 이때 드리는 제사를 각심제라 부르게 된 것이다.


공릉동

공덕굴 치성제(공릉동)
먹골 늑대할머니 무당의 오래된 굿터로 수양딸인 무당에게 전수되어 지금까지 만신이 한번도 바뀐적이 없다고 한다. 떡, 쇠머리, 과일 등을 차려놓고 마을의 평안을 기리는 전형적인 대동굿이다. 굿은 2년에 한번으로 짝수해인 음력 초이틀이나 초사흘날에 치러진다. 굿날이 정해지면 우물터 주위에 외로 꼰 새끼줄로 금줄을 쳤으며 마을사람들은 출입을 삼가고 부정이 없는 가정을 시주, 화주, 도가로 정해 3일 전부터 굿 준비에 들어갔으며 굿에 필요한 비용은 각 가정에서 추렴하였다. 떡시루가 아홉 개인데 각 떡시루에는 바치는 이의 이름이 있으며 굿거리는 전형적인 12거리이다.


하계동

용동부락산신제
하계1동 전통 산신제로 음력 2월 1일과 10월 1일 두 차례 모셔지며, 용동부락 노인정에서 동북쪽으로 약 500m정도 올라간 불암산 기슭 마을 뒷산 중턱에 있는 큰 널석바위에서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산신제를 지낸다.


중계동

은행마을 대동굿
2년에 한번씩 짝수해인 10월 1,2,3일 중 좋은날을 받아 ‘도당할아버지’를 모시는 마을 전통굿으로서 이웃 광석마을 대동굿인 ‘도당 할머니’를 모시는 굿과 함께 열리기도 했으며 두 어른의 혼을 달래줌으로써 마을의 일이 잘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하루 동안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즐겁게 놀았다. ‘대동 단결한다’의 의미로 오늘날까지 행해지고 있다.

구능치성제
마을의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느티나무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구능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는 제사로서 중계4동 144번지 근처에 치성터가 있다. 이 치성터 주위에는 큰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으며 제삿날은 매년 음력 9월 14일이다.

불암산신제
중계본동 1통에서 8통은 1967년부터 각지에서 모여든 철거민들의 이주촌으로서 어렵게 마을을 형성한 탓인지 서로 융화되지 못하고 불화가 잦았다. 이에 이를 막아보자는 의미에서 불암 산신제가 시작되었으며, 당시 6통 통장이던 정씨가 풍수를 보았는데 그들이 정착한 104번지 일대가 원래는 용이 누운 형상 이었는데 이주민이 정착하면서 그 용이 노했기에 많은 불화와 갈등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풍수를 보아 용의 턱자리에 정성껏 음식을 올리고 1988년까지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그곳은 104번지 주민들이 살고있는 곳과는 거리도 멀고 당시 제를 모시던 분들이 그곳까지 오기가 불편하여 1989년부터는 음력 4월 좋은날을 받아 1통 은혜사 앞에 터를 마련하여 현재 제사를 모시고 있다.


상계동

간촌마을 산신제
옛날부터 나라의 번영과 마을의 안녕을 위해 우두정(牛頭井)의 물을 길어 지냈다. 음력 7월 초하루와 10월 초하루 연 2회 산신제를 지내며, 산신제 터는 상계5동 금호아파트 단지에서 수락산 자락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 우측면 계곡으로 올라가면 배드민턴 클럽이 나오고 입구 계곡에 산신제 터가 있다.

벽운마을 산신제
조선 영조때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이 그 별당 우우당에 기거하면서 여러 인사들과 모여 나랏일을 논의 하였는데 그때 국가의 안녕과 마을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어 오늘까지 이어졌다. 제사는 매년 3월과 9월에 지낸다. 특이한 점은 돼지머리와 술을 사용하는 일반제사와 달리 생수와 북어 등 마른 해물을 제물로 이용하는데, 이곳 지형이 음(陰) 기운이 강한 암산(女山)이기 때문이다. 우우당에서 수락산으로 약 10분 정도 올라가면 벽운산악회 건물이 나오는데 산신제 터는 건물뒤 산기슭에 있다.

당고개 산신제
과거 산림이 우거진 험준한 산골로 야생동물의 출현이 빈번하여 사람의 통행이 매우 어려운 고개였다. 이에 통행인들이 자신의 몸을 보호할 목적으로 돌을 들고 고개를 넘게되었고 고개를 무사히 넘은 뒤 필요 없어진 돌을 던져 놓았는데 돌이 하나 둘 자연스럽게 쌓이게 되어 돌무덤이 되었다. 이후 이곳은 동네 주민들의 기원을 비는 성황당이 되어 전래신앙을 숭상하던 많은 사람들이 매년 1월 15일 몸을 단정히 한 후 노송나무에 금줄을 치고 오색천을 두른 후 동네 재앙을 물리치는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현재는 아파트 단지와 상가가 도로를 중심으로 주변에 들어서있다. 성황당이 있었던 자리에 산신제의 유래를 기록한 당고개 표석만이 남아있다.







팥배나무숲





초안산에는 늦은 봄이 되면 팥배나무 꽃을 볼 수 있습니다.

팥배나무는 우리나라 전역 산지의 표고 100~1,300m에서 자생하는 낙엽활엽교목입니다.

참나무, 서어나무와 함께 우리나라 산 어디에서나 불 수 있는 나무입니다.

팥배나무는 열매의 모양이 팥처럼 생겼고 꽃은 배꽃처럼 생겨서 팥배나무라고 합니다.

열매는 배고픈 산새들이 좋아하고, 꽃에는 꿀이 많아서 벌과 나비가 끊이지 않습니다.

초안산에는 팥배나무만 자라고 있는 곳도 있고, 아까시나무, 갈참나무, 상수리나무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군집성이강해 집단을 형성하며 내음성이 높고 내한성도 강하며 건조한 척박지에서도 잘 생육한다.

서양에서는 이 나무가 한국의 산에 많다 하여‘Korean mountain ash’라 부릅니다.

이 나무는 또한 산성비에 특히 강해 앞으로 조경수로 전망이매우 밝으나 번식이 힘들기 때문에 산에서 자생하고 있는 팥배나무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익은 열매는 팥알만한데 앵두나 찔레 열매같이 생겼다.

배고픈 산새들의 먹이가 되기도 하고, 사람들이 과실주를 담그거나 위장병에 좋다고 하여 다려먹기도 합니다. 

나무껍질과 잎에서는 붉은색의 천연 염료를 얻을 수 있는데 색감이 아주 좋아서 앞으로 천연염료 로서의 개발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합니다.






파충류와 양서류




2006년에 서울지역에서 최초로 멸종위기종인 표범장지뱀이 초안산에서 관찰되었습니다

초안산에는 맹꽁이, 무당개구리, 청개구리 등 다양한 양서류와 파중류가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2년에는 두꺼비, 도룡뇽, 산개구리 등 3종 1500마리를 방사하기도 했습니다.






죽은나무는 어린나무를키웁니다_초안산나들길



 


초안산에서 죽은채로 쓰러져있는 나무들을 찾아보세요.

이런 나무들이 새로운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양분으로 다른 생명들을 키우고 가꾸는 나무를 숲을 보호하는 나무(nurse log)라 부릅니다.

초안산에서는 이런 나무를 얼마나 많이 찾을 수 있을까요?








아까시나무숲


 

초안산에는 아까시나무 숲이 전체 숲 면적의 46%정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까시나무는 약 25년에서 30년 정도 되었으며 아까시나무 아래층에는 참나무류가 자라고 있어 오랜 시간이 지나면 참나무 숲으로 천이가 이루어 질 것으로 보입니다.

아까시나무는 야트막한 민둥산에 심으면 다른 나무보다 빨리 자라서 10~20년내에 무성한 숲을 만들죠.

황폐해진 곳에 아카시나무를 심으면 영양분을 땅에 공급해 주고 20~30년 후에는 저절로 생육이 약해져서 다른 식물들이 잘 자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줍니다.

아까시나무는 황폐한 대지에 먼저 들어가 숲 생태계의 밑바탕을 만들어 주는 개척수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숲은움직이고변합니다. _초안산나들길





숲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합니다. 아무것도 없던 대지는 풀과 관목류로 바뀌고 마침내 나무들이 살고 있는 숲으로 변합니다. 동물과 식물들이 살고 모든 곳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고 자라며 움직이고 변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천이라고 합니다.
초안산에서는 천이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요?




딱따구리_초안산나들길



 


나무를 쪼는 소리가 들리시나요?

초안산에는 청딱따구리, 오색딱다구리, 쇠딱다구리 들이
살 고 있습니다.

딱따구리를 '숲 속의 의사'라고도 합니다.
딱따구리들은 숲속의 다른 새보다
훨씬 많은 벌레들을 잡아먹기 때문입니다.
병들거나 죽어가는 나무 속에는 많은 벌레들이 알을 낳거나 애벌레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 벌레들을 그냥 놔둔다면 숲은 병들어 버릴 것입니다.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를 우리는 참나무라고 합니다.
참나무는 여러 종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섞일 수 있어 구별하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
초안산에는 어떤 참나무가 자라고 있을까요?

참나무 숲은 초안산 전체 산림 중에서 약 16.4%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참나무는 상수리나무와 신갈나무입니다.






녹천의유래_초안산나들길

녹천마을은 월계동의 중심인 월계2동683,685번지일대를 말합니다.

월계동의 중심이 되는 녹촌은 녹천(鹿川)이라고도 합니다.

북한산 지맥으로 이어진 크고 작은 산맥이 월계동 근방에 오면 높이 100m 내외의 야산으로 변하는데 그 사이로 계곡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의 하천은 두 가닥으로 시작해서 767번지 근방에서 하나로 합쳐집니다.

이 모습이 마치 사슴 머리에 난 뿔 같다 하여 녹촌이라 불렀습니다.

조선 중기때 중랑천이 범람해서 우이천까지 물이 흘러들어 가는 큰 홍수로 인해 지금의 월계로 근방 마을은 모두 폐허가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황급히 뒷산으로 이주하여 인명에는 피해가 없었지만 가재도구와 넓은 논밭이 온통 황토흙으로 뒤엎여 살길이 막막해졌음을 통탄하면서 이에 대한 대책마련을 위해 능록의 뒷산에 모여 회의를 소집 하였습니다.

회의석상에서 마을의 촌주 한사람이 지난밤 꿈에 신선을 만나 내일 있을 회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신선은 내일 정오에 중랑천가에 푸른사슴 한 마리가 내려와 목욕을 할 것이니 제물을 준비해 두었다가 사슴에게 바치고 마을에서 가장 예쁘고 정숙한 처녀 한사람을 사슴에게 시집보내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답을 해주고는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반대하는 의논도 있었으나 이왕 폐허가 된 마을을 살리는 방법이니 한번 실행해보자는 의견으로 기울어 마침내 염씨(簾氏) 집의 15세 난 딸을 사슴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며칠 후 신선이 시킨대로 산 정상에 제물을 준비하여 사슴이 내려오기를 기다리자 과연 사슴 한 마리가산에서 내려와 중랑천에서 목욕을 하였습니다.

마을 회의에서 결정한대로 염씨 처녀를 곱게 단장시켜 제물 옆에 다소곳하게 앉혀 두었는데 목욕을 끝낸 사슴이 등을 돌리며 처녀더러 타라는 시늉을 하였다. 처녀는 사슴이 시킨대로 등에 올라탔는데 처녀를 태우고 동네를 한바퀴 돌아본 사슴이 766번지 쯤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지금의 하천이 생긴 방향으로 사라졌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사슴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자멀리서 물줄기 두 개가 나무가지 모양으로 흐르기 시작하더니 중간쯤에서 합쳐서 한줄기로 되면서 황토흙으로 뒤덮였던 마을 앞 전답이 기름진 검은색으로 변했습니다. 

사람들이 이 신기한 일에 놀라워하자 그중 한 사람이 "이건 사슴과 결혼한 염씨 처녀의 눈물이니 냇물 이름을 녹천이라 하자"고 제의하였습니다. 







참꽃개꽃_쌍문역사산책길




 참꽃: 나는 봄이 되면 우리나라 야산을 붉게 물들이지

사람들은 내 꽃으로 봄에 화전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두견새가 밤새 울다가 토한 피와 색이 같아서 두견화라고도 해.

개꽃: 나는 사람들이 먹지 못한다고 해서 개꽃이라고 불러.
그래도 지나가는 나그네가 나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꾸 걸음을 멈출 정도로 아름다워 산객이라고도 해.

참꽃: 음유시인 김소월은 나를 주제로 하여 아주 유명한 시도 만들었지... 아마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두 알거야..

개꽃: 나는 신라시대 수로부인도 보고 감탄했을 정도로 유명한 꽃이지. 그 꽃을 꺾어 가져다준 노인이 헌화가를 만들기도 했어.

참꽃: 나는 진달래.

개꽃: 나는 철쭉.

우리는 다른  점도 있지만 비슷한 형제야
크지는 않지만
봄이 되면 온 산을 붉게 물들여
봄의 절정을 알리지...

우리는 진달래와 철쭉이야...






직박구리_쌍문역사산책길


직박구리라는 새 이름은 시끄럽게 우는 새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옛날 시골에선 역시 시끄럽게 떠들어 댄다고 '떠들이 새'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지요.
기후와 환경이 변화하면서 생태계도 많이 변하고 있습니다.
요즘 도시와 농촌, 산간지방을 막론하고 개체수가 눈이 띄게 늘어난 텃새가 직박구리입니다.
도시지역에 많이 심는 작은 과일나무가 직박구리에겐 아주 좋은 먹이가 됩니다. 직박구리는 과일뿐만 아니라 꿀도 아주 좋아하는 새입니다.






잎의일년_쌍문역사산책길





 나의이야기를 들어보세요...
겨울이 지나고 해가 길어져 갑니다.
바람도 이제는 살랑살랑 내 몸을 스쳐 지나갑니다.

멀리 땅 속 뿌리가 말합니다. 이제 물을 보내겠노라고.
곧, 우리는 밝은 곳으로 나갈 것입니다. 봄입니다.
껍질을 뚫고 나옵니다. 세상은 밝고 바람 또한 시원합니다.

나는 몇 개월 동안
몸에 있는 물을 배출하는 일(증산작용),
빛을 이용해 양분과 산소를 만드는 일(광합성작용)
숨 쉬는 일(호흡작용)을 해야 합니다.

꽃이 피는 봄,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단풍드는 가을이 옵니다.
다람쥐들은 열매를 모으기 위해 분주합니다.
엽록소가 없어지고 내 본연의 색인 황토 빛 피부가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단풍들었다 하지요.

이제 다시 내년을 준비해야 합니다.

나는 신갈나무 잎입니다.




방학쌍문옛지명_쌍문역사산책길



쌍문동과 방학동의 옛 지명들을 찾아보면 다양한 마을과 지역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쌍문동
쇠죽골 : 쌍문1동 내시 묘가 있는 아랫마을. 동대문 시장에 소를 매매하러 가기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소장수들이 이곳에서 쇠죽을 먹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소여물골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제성겻 : 계성과 그의 효성 지극한 아들이 살았다는 마을. 쌍문제1동에 해당합니다.
해등천 : 현 쌍문제2동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소군래라는 하천에서 깨끗한 물이 이 마을을 거쳐 방학동으로 흘렀는데, 물이 바닷물처럼 맑아서 해등천이라 불렀습니다. 현재, 해등로라는 길이 있습니다.

방학동
원당이: 소원을 비는 신당이 있어서 생긴이름으로 한자로 원당리(元唐里)입니다.
가살피 : 방학동과 도봉동과의 경계지점에 있는 마을
도당마을 : 현재 방학 3동 신동아 4차 아파트 단지 일대로 도봉산자락에 복숭아꽃, 오얏꽃 등 이 만발하는 평화로운 마을로, 요순시대 요 임금의 칭호인 제요도당씨(帝堯陶唐氏)에서 '도당'이라는 글자를 따서 도당마을이라 하였답니다.
금잇들 : 방학동 도당마을 앞에 있는 들. 거머리가 많았다고 합니다.
성고개 : 바위가 성(城)과 같은 고개 밑에 있는 마을. 바위를 돌아 들어간다 하여 암회리(岩回 里)라고도 불렀습니다.





발바닥공원_쌍문역사산책길



도봉구 발바닥공원은 마른하천인 방학천을 따라 조성된 생태공원입니다.




1960년 중반에 형성되기 시작한 무허가 판자촌을 2002년에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생태공원으로 조성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쓰레기와 오물 악취가 풍기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구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쉼터로 재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판자촌에서 녹색 공원으로 변신한 운명이 평소 하찮게 여기다 관리의 중요성을 새삼 인정받고 있는 우리 몸의 발바닥과 비슷하다고 해서 그렇게 붙였다고 합니다.


환경교육센터

도봉구청은 2003년 여유 공간을 용도 변경하여 환경교육센터를 만들었습니다. 

전체 건평이 45평에 강의실 하나 밖에 없는 작은 공간으로 시작하였고, 2012년 교육장의 증축으로 인해 교육시설이 한곳 더 생겼습니다. 

도봉환경교실은 특히 2002년 환경단체들의 연대활동으로 지자체 기초의원으로 당선 시킨 환경후보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도봉환경교실은 2003년 직영 운영에서 2004년 (사)환경교육센터로 위탁 운영되면서 프로그램 중심의 환경교육센터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도봉환경교실은 발바닥 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공원의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자연체험활동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다양한 환경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성인대상의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생활실천 프로그램, 지역 단체 및 학교로 찾아가는 단체지원 환경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환경교육 자원봉사단체인 자연해설단과 함께 도봉환경교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도봉환경교실 환경배움터!
- 배움터에는 건강한 환경에서 잘 자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도담도담 교육장, 교육준비실, 사무실로 구성.


- 환경배움터 2012년 10월부터 환경교육 프로그램 진행.


- 오전 단체 환경프로그램의 확대 운영가능 – 기후변화 스쿨, 자연체험활동, 수교실 등 다양한 주제의 환경교육 프로그램의 운영이 가능해짐.


- 기존의 초등학교 중심의 프로그램에서 주부, 청소년, 지역단체 환경동아리 등 환경교육 프로그램 참여 대상의 폭이 넓어 짐


환경교육 프로그램 예약은 인터넷 및 전화로 사전 협의하시기 바랍니다. 
[전화: 02)954-1589 / www.ecoclas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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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문역사산책길 문화재와 함께



쌍문역사산책길에는 다양한 문화재와 역사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10대 임금인 연산군묘, 세종대왕의 둘째 딸 정의공주묘, 사천목 재실, 수백년 동안 이용된 원당천 그리고 수령이 1000년이나 된 서울시 지정 보호수 1호 방학동 은행나무 등 다양한 문화재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연산군묘

조선시대 제10대 임금인 연산군(1476~1506년)과 왕비였던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로 왕릉보다는 간소하나 조선시대 전기 능묘석물의 조형이 잘 남아있습니다.



연산군은 성종 7년(1476) 성종의 큰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폐비 윤씨입니다.
1494년 왕위에 올랐으나 1506년 왕직을 박탈당하고 강화 교동으로 추방되었다가 그 해에 죽었습니다. 

부인 신씨가 연산군 무덤을 강화에서 현재의 이곳으로 옮겨 달라 청하여 정덕8년(1513) 옮기에 되었고, 부인 신씨의 묘, 연산군의 딸과 사위의 무덤이 있으며, 혼유석·장명등·향로석 등 석물이 서 있습니다. 
연산군은 비록 왕을 지냈으나 그 지위가 군으로 강봉되었기에 무덤을 묘라 하였습니다.






방학동 은행나무

방학동 은행나무(放學洞 銀杏나무)는 서울특별시 지정보호수 제1호(1968.2.26.) 및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3호(2013.3.28.)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나무의 높이는 24m, 둘레는 9.6m, 수령은 600년으로 서울특별시에서 최고령 그룹에 속하는 은행나무입니다.

이 은행나무는 그 모습이 매우 고상하고 아름다우며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신성시하였고, 이 곳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생겼다고 하는 일화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도봉구에서는 은행나무의 생육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인근 아파트 단지가 조성될 때 나무의 생육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아파트 구조를 변경하였으며, 그 후 은행나무 인근에 다세대주택으로 인해 나무가 가지를 뻗지 못하는 등 생육환경이 문제가 되자 주택을 매입하여 생육환경 조성을 위한 공원조성사업을 추진하여 녹지 공간 및 주민쉼터를 확보하였습니다.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546번지에 위치한 방학동 은행나무는 그 규모가 크고, 수령이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어 1968년 2월 26일 서울특별시 보호수 1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본래는 은행나무의 동남쪽 200m 지점 은행나무가 한 그루 더 있어, 이 두 은행나무를 “부부 은행나무”라 불렀다고 하는데 현 기념물 지정 나무는 수나무이며, 암나무는 신동아아파트 건립 당시 벌목되었다고 합니다.

기존에 관리되고 있었던 서울특별시 보호수 목록은 추정 수령이 880년에 달하고 있으나, 금번 문화재 지정 조사 시 실시한 국립산림과학원의 과학적 수령조사 결과 600년으로 측정되었다. 이는 천연기념물 및 시지정 문화재로 지정된 수목들과 비교하여도 최고령그룹에 속하는 것으로 천연기념물 제59호 <서울 문묘 은행나무>의 수령 702년 다음으로 수령이 오래된 것입니다.








원당샘공원

원당샘은 600여년 전 파평윤씨 일가가 자연부락인 원당마을에 정착하면서 이용하였다고 합니다. 마을 이름을 따서 원당샘으로 불리워지고 수 백년 동안 생활용수로 공급되었습니다. 그러나 2009년부터 물이 흐르지 않아 2011년 지하수를 연결하여 원당샘이 마르지 않고 흐를 수 있도록 복원하였으며, 북한산둘레길과 인접되어 있어 주민과 등산객의 왕래가 빈번한 곳으로써 원당샘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하게되어 연산군묘 및 은행나무와 함께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지는 새로운 도봉구의 문화명소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위치 : 도봉구 방학동 547번지 일대

방학동은행나무, 원당샘, 연산군 묘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도봉산 연봉의 남쪽 작은 봉우리인 시루봉 기슭 도봉구 방학동 산 63-1번지에 양효공신도비와 묘소(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0호)가 있습니다.

신도비는 세종의 부마 안맹담과 둘째 딸 정의공주의 묘가 있는 묘역 아래에 세워져 있고, 묘에는 각각 묘갈과 혼유석이 갖추어져 있으며, 석등과 문인석 4구가 서 있습니다. 신도비 비문의 끝부분에 ‘成化丙戌立’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세조 12년(1466)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묘역 뒤로 올라가면 양효공의 딸 정경부인 안씨의 묘와 덕종비 소혜왕후 한씨의 오라비 서릉부원군 한치례의 묘도 있습니다. 또 양효공 내외의 묘소 뒷편 동남쪽 산기슭에는 인조∼숙종 때의 대신 목서흠과 목내선 일가의 묘역이 있으며, 그 북쪽으로는 최근에 천주교묘지가 설치되기도 하였습니다. 아울러 남쪽 방학로 건너에는 연산군 묘역이 있습니다.





원당샘공원, 연산군묘, 방학동 은행나무 교통편

전철4호선 창동역(2번출구) 또는 녹천역(1번출구) 이용 (도보 5분 거리)

버스 1133번, 1157번 창일중학교 앞 하차, 1138번 창1동주민센터 하차




2013년 5월 22일 수요일

방학동 유래



방학동의 유래



방학동 동명의 유래에 관해서는 도봉서원(道峯書院)의 창건과 관련하여 조선시대 어느 임금이 도봉서원의 터를 정하기 위하여 도봉산 중턱에 앉아 있다가 학(鶴)이 평화스럽게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방학(放鶴)이라하였다는 이야기와 또 이곳 지형이 학이 알을 품고 있는것 같다고 하여 방학(放鶴)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학(鶴)과 관련된 전설은 아마도 한자(漢字)로 방학리(放鶴里)란 지명이 이루어진 후에 덧붙여진 이야기로 보인다.

또한 곡식을 찧는 기구인 방아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말로 ‘방아골(굴)’로 불리던 것을 한자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음이 비슷한 방학리(放鶴里)로 고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최근에는 방학동의 원래 이름은 암회리(岩回里)였는데, 도봉산 줄기가 동남방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다시 되돌아와 암회리라 했던 것을 학(鶴)이 날아가는 형국의 지세로 보아 풍수지리가의 조언으로 일제시대 ‘방학(放鶴)’이라 작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목 해등촌면 지역이었고, 1914년 노해면 방학리로 되었다. 1963년 서울시 성북구에 편입되면서 방학동으로 되었고, 1973년 도봉구 관할로 되었다. 1975년 도봉동에서 분동하였으며 1980년 방학1·2동으로 분동, 1988년 2동이 다시 2·3동으로 분동되었다. 법정동인 방학동은 행정동인 방학1~4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통은 방학로가 마을의 중심을 지나며, 성북구에서 의정부시로 나가는 도봉로가 동쪽으로 지나고 있다. 예로부터 도심에서 멀지 않은 지역이어서 북한산 자락에는 왕실과 귀족들의 묘소가 많이 있다.






방학동은 자연마을인 암회리, 도당리, 원당리 일부와 방학리가 합쳐져서 방학동이 되었습니다.

방아골 현재 방학2동 방아공종합사회복지관 일대

도당마을 현재 방학3동 신동아 4차아파트 단지일대

암회리 현재 방학3동 지역

원당리 현재 대원군묘 일대



쌍문동 유래


쌍문동 유래
쌍문동 동명(洞名)의 유래는 몇 가지가 전해온다.
하나는 현 쌍문동 286번지 근처에 계성(鷄聲)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계성과 그 부인이 이름모를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이 생시에 부모를 정성껏 모시지 못한 것을 후회하여 부모의 묘 앞에 움집을 짓고 여러해 동안 기거하다가 죽자 마을 사람들이 그의 효성을 지극히 여겨 그의 묘 근처에 효자문(孝子門)을 두 개 세운데서 쌍문(雙門)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옛날에는 현 창동 우체국부근에 열녀문이 두 개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또 쌍갈래길에 이문(里門)이 있었으므로 ‘쌍갈무늬’가 쌍문으로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최근에는 ‘쌍문(雙門)’은 효자문(孝子門)이 두 개라 쌍문이라 한것인데, 효자 남궁지와 그의 처 하동 정씨(鄭氏), 그의 아들 효자 남궁 조 부자가 고종으로부터 효자문을 받았는데 부자(父子)의 묘소가 노해파출소(옛 쌍문동 중심지)에서 볼 때 남과 북에 있어 ‘쌍문’이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목 해등촌면에 속하였으며, 1912년에 편찬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경기도편에 나타나는 양주군 해등촌면 12개 리 가운데 소라리(所蘿里)·계성리(鷄聲里)지역에 해당한다. 1914년 노원면과 해등촌면이 통합되어 노해면이 설치되었을 때 소라리·계성리가 통합되면서 쌍문리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났다.
1963년 1월 1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이 서울시 성북구 노해출장소에 편입되면서 쌍문리는 창동 동사무소 관할 하에 있었다. 1973년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도봉구에 편입되었으며,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쌍문1~4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1960년 이전까지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을 위주로 하고 있었으며, 그 후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하여 쌍문로와 도봉로 주위에는 상가가 밀집되어 있다. 자연마을로 계성동, 쇠죽골, 해등천 등이 있었는데, 이 마을들이 합쳐져 동을 형성하였다.
▲박수겻 고개 : 쌍문리에 있는 고개
▲쇠죽골 : 쌍문1동 내시묘(內侍墓)가 있는 아랫마을인데, 동대문시장에 소를 팔러 가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소장수들이 이곳에서 쇠죽을 먹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소여물골이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경기도와 서울의 연락도로로 주막도 있었다.
▲제성동 : 계성과 효성 지극한 아들이 살았다는 마을. 지금의 쌍문1동 지역.
▲해등천(海等川) : 현 쌍문2동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소군래라는 하천에서 깨끗한 물이 이마을을 거쳐 방학동으로 흘렀는데, 물이 바닷물처럼 맑아서 해등천이라고 불렀다고 함.



끊임없는 물의 여행_쌍문역사산책길


물을 여행하는데 꼭 필요한 힘은 태양열입니다.
물은 태양열을 받아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어 다시 비와 눈으로 내리는 일을 쉴새없이 반복합니다.

지구에 있는 전체 물의 양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태초부터 지구가 갖고 있는 물의 양은 단 한 방울도 늘거나 줄어들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물은 지하수로, 강물로, 바닷물로 변하면서 끊임없는
순환여행을 하고있습니다.
그래서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들은 물을 이용해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2013년 5월 9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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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간안내 필요함

측면 경관이 좋지는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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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와 연산군묘 
원당샘으로 들어가는 입구 
원당샘을 통과하여 이동하게 됨 
길안내 표시 필요 
방향 안내판과 구간안내판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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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공주 묘
북한산 둘레길과 겹침 안내가 필요함 바닥 마크도 필요할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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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상 지역 
이곳에서 길을 건너서 새로운 길로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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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안내판 설치
주변길에 구간안내판 필요


쌍문교

 쌍문교
해설판 설치 및 구간안내 판 설치

설치의 의미를 넣어서 만들어 보면 좋을 것으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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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안내판 설치 방향이 3개소로 연결됨

쌍문교 방향으로

방향안내판에 초록숲길을 표시할 수 있도록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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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폭포 주변
길 확정이 필요함
약간 돌아가는 길로 부 동선에도 표시가 필요할 것으로 보임

여름에는 벽천을 보고 지나가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이고 기둥형 방향안내판을 설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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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안내판
이정표 교체 및 기둥 도색함
방향안내에 대한 내용 수집이 필요함



세심천

세심천약수터
종합안내판 수정 보완이 필요함
걷고 싶은길과 초록숲길을 포함한 안내판이 필요함

기존안내판을 이용해서 보완함

지도표시 수정 필요



쌍문근린공원 입구


쌍문근린공원 입구
원당샘과 연결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함
원당샘과 연결은 초등학교를 지나서 연결함이 좋음


2013년 5월 4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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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유도사인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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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되는 부분 이제 모두 연결되었음. 방향안내판 설치 필요함 어느곳이든 갈 수 있다.

이곳에는 박새 직박구리 딱따구리 등 다양한 서울 새들이 살고 있다.

2013년 5월 2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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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유도 안내판 필요.

연결을 위헌 안내판 설치.

밤나무가 많이 있어서 밤을 볼 수 있음 많이.

밤나무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을 것으로 보임 밤나무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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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 작은 길로 들어가야한다 보안등에 작은 방향안내판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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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을 잡아야 하는 곳 어디로 돌려서 어디로 갈 것인가. 다 정상으로 간다고 한다. 이길을 선택할 것인가 다른길을 선택할 것인가 걱정임.

방향안내판 팔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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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방향안내 유도사인을 설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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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안내판 기둥형 내려오면서 우측으로 움직여야지 큰길이 나옴 언전한 길임 그런데 볼거리는 없음 어느방향으로 유도할까는 생각해볼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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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방향안내판 설치 필요. 연결 될 수 있도록 함.

방향안내와 구역안내를 설치함 연결이 필요함 어떻게 될지는 생각해보고 움직일 필요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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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으로 내려옴
소규모 생물서삭공간 연못이 있음. 일본 목련이 크게 자라고 있음 이곳은 앞으로 공원이 확장되어 만들어 질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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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안내판. 위치를 질 잡고 이동.
기둥형

설치